창업록: Bayesians
지난 2025년 4월 17일 우리 팀은 미국에 법인을 만들었다. 최종적으로는 그다음 날에 승인됐지만 우리는 내 생일인 4월 17일을 우리의 Day One으로 삼았다. 이 글은 25년 1월 17일부터 25년 4월 17일까지 90일 동안 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전설의 시작
1월 중순, 앤틀러에서 만났던 인연과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하고 또다시 개인이 되었다. 그 뒤로도 혼자 일을 계속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는 막막한 감이 있었던 것 같다. 반드시 같이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혼자서 하다 보니 내 능력의 한계 내에서만 사고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 생각하던 비즈니스는 개인을 위한 정보 관리 서비스였다. 그중에서도 뉴스레터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걸 생각했는데, 그 문제가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뭔가 내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한정되는 느낌이 들자 ‘나에게는 공동 창업자가 필수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링크드인에 커피챗을 하자고 글을 올렸다. 공동 창업자를 바로 찾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글에서처럼 실제로 창업이라는 과정을 정말 정말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이라, 아이디어도 충전하고, 어떻게든 연결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정말 신기하게도 13,790 impressions가 나왔다. 여태 썼던 글 중 가장 많이 사람들에게 퍼졌던 글인 것 같다. 정말 많이 퍼진 만큼 정말 많은 분이 커피챗을 하자고 말씀 주셨다. 일주일 동안 22번의 약속을 19명과 잡았다.
‘무료 개발자를 찾습니다.’ 같은 커피챗도 요청도 있었다. “개발자가 없습니다.”, “내가 진짜 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요런 느낌? 그런 경우는 팀에는 조인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그럼에도 커피챗이 괜찮을지 여쭤봤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안 보기로 하고 건승을 바란다고 해주셨다.
MJ는 19명 중 한 명이었고 두 번 만나본 사람이기도 하다. MJ는 첫 만남에 시원하게 지각하고 점심을 샀다. 그때 뵀을 때는 캐주얼한 정도로 얘기를 나누고 늘 그렇듯 창업의 동기나 꿈의 크기를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두 번째 만남은 카페에서 First Round가 배포한 공동 창업자 간 50 Questions에 대한 답변을 각자 준비해 와서 맞춰봤다. 개인적으로 작성했던 25년 4주 차 회고를 보니 50 Questions에 대한 답변도 잘 맞는다고 느끼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점, 창업을 대하는 태도에도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만족스러웠던 점은 공동 창업자에게 10~15년 클리프를 걸고 싶어 했던 점이었다. 공동 창업자가 나가지 못하게 하는 데 나만큼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고 ‘이 사람은 끝까지 창업하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합의된 목표와 팀의 색
우리는 둘 다 미국에 가는 것, 그리고 Day 1부터 글로벌 서비스를 만드는 걸 기본으로 두었다. 이번 사업에서 특별한 도메인을 정하지 않았던 우리의 기준은 최소 1조 5천억($1B) 이상의 기업이 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거였다. 범지구적으로 50조~100조 정도의 시장이면 어떤 세그먼트로 파는지와 관계없이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합을 맞춰본 영역은 연구자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Cursor가 그랬던 것처럼 연구자들이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패턴에서 최적의 UX를 만들 수 있다고 봤다. 10명 정도의 연구자를 인터뷰한 다음 동일한 패턴을 확인했고 일단 첫 번째 제품을 Notion for Researcher 같은 형태로 접근했다. 우리는 Notion처럼 정리할 수 있는 에디팅 도구, PDF Viewer, PDF를 아주 잘 이해한 RAG를 붙여놓은 서비스를 3일 만에 만들고 배포했다. 그리고 인터뷰했던 사람 중 몇 사람과 다시 얘기했지만 우리가 전달하는 가치가 매우 모호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는 ‘인터뷰를 하면서 봤던 패턴을 최적화한 제품이 이게 맞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이 영역에 대해 고민했을 때는 ‘이렇게 비좁은 시장을 파보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영역에서 더 구체화하는 과정에 고객의 세그먼트가 더 좁아졌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목표에 맞지 않는 규모가 된다고 판단해 다른 아이템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사실 유의미했던 건 MJ와 일한다면 어떤 느낌이겠구나 하는 대략적인 감을 잡을 수 있었다.
- 우리는 성질이 매우 급한 사람들이다. 팀에는 결론 이외는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고 결론으로 달려가는 힘이 있다. 이러한 성질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주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꽤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 우리는 둘 다 이성을 잘 사용한다. 문제를 정의하는 방식이라든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합리적인지 생각할 줄 안다.
- 우리는 일을 비슷한 정도로 좋아하는 것 같다. 공동 창업자를 만날 때 항상 다들 일 하는 걸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지속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보면 아주 잘 맞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일하는 게 너무 좋으면 더 많이 해도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슷하게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가 꽤 오래 해도 괜찮은 영역
그 뒤로 우리는 매우 빠르게 아이템을 생각해 내고 검증해 갔다. 지금 하고 있는 아이템 전에 다섯 개 정도가 있었고 거의 1주일에 한 개의 아이템을 확인했다. 아이템 찾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계속하고 있었지만, 아이템이 도메인 단위로 바뀌는 경우 이전에 조금이라도 쌓였던 팀의 노하우, 배운 점들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현상이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가 꽤 오래 해도 괜찮은 영역 안에서 계속 피봇하며 나아갈 영역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2주 이상 진행했던 도메인이 ‘애니메이션’ 영역이다. 2D Animation은 MJ의 애착이 있는 콘텐츠 영역이기도 하고 졸업 전에 관련 AI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는 영역이었다. 나 역시도 덕후의 영역까진 도달하진 못했지만 2D 애니메이션을 보는 걸 어렸을 때부터 즐기고 있다. 처음에는 애니메이션 제작 영역에서의 AI 도구를 생각했는데 팀 안에서의 생각과 여러 도움을 주시는 분들의 생각을 조합해 Consumer 쪽까지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Consumer 쪽은 어떤 문제의 영역이라기보단 재미의 영역이라, 논리보다는 믿음이 필요한 것 같은 부분이 있다. 창업자 개인들의 경험에 따라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데 비용을 기존보다 1/10000 해버릴 수 있다면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우리가 이걸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Wattpad의 수백만 뷰의 작품을 AI Animation으로 Adoption하고 자동화하는 중이다.
원작자와 긴밀히 협업하는 중인데, 다행히 AI Anime의 초기 퀄리티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AI Video 영역에서 어떤 큰 서비스가 나올 On-Time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지금 당장 만들어내는 퀄리티가 부족하거나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GPT처럼 곧 Consumer 수준까지 떨어지고 빨라지고 좋아질 것이다. 우리는 그 On-Time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진다.
성공하거나 성공 중이거나
나는 노홍철 형님의 사고를 굉장히 좋아한다. 빠니보틀 채널에서 홍철 형님이 보틀 형님과 여행하던 중에 했던 말이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데 모두 잘 되세요?’라는 질문에 ‘될 때까지 했다’라고 답했다. 포기하기 전까지는 모두 성공하는 중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기할 것 같지 않은 팀은 실패할 것 같지 않은 팀과 동일한 말이다. 내 생각에 지금 우리 팀은 개인 또는 가족의 심각한 상해 및 질병으로 인해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실패할 것 같지 않은 팀이다. 앞으로 성공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텐데, 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어쨌든 해낼 팀’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Day 1
여러 복합적 이유로 미국 법인을 후다닥 만들게 되었다. 생일에 법인을 발족했다는 게 또 다른 애착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Bayesians는 작년에 창업하면서 여러 상황의 Organization 이름으로 사용했던 이름이다. AI와 밀접하기도 하지만 조건부 확률을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결정의 승률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 지었던 이름이다. MJ가 이름이 괜찮은 것 같다 해 지금까지 아이템과 무관하게 팀 이름으로 사용 중이다. 지금까지는 Stealth 상태로 있었지만, 이제는 확정적으로 팀을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다.
창업록: Bayesians